충북 단양에서 역사여행코스로 추천하는 신라적성비 등 여행코스를 소개드려요~
충북 단양에서 역사여행코스로 추천하는 신라적성비 등 여행코스를 소개드려요~
6세기 중엽, 신라는 한강을 넘어 오늘날 함경도 남쪽에 해당하는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자기 영토로 삼습니다. 모두 진흥왕이 이룩한 업적인데요, 그 시작점이 바로 지금 이야기하려는 단양입니다. 고구려 땅이던 단양을 빼앗으면서 한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고, 한강이 신라 땅이 되면서 더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 것입니다. 고맙게도 단양에는 약 1500년 전에 일어난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이 오늘날까지 유물과 유적으로 생생히 전해지고 있으니, 바로 신라적성비와 적성산성입니다. 저는 신라적성비와 적성산성을 살펴보러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팔경휴게소로 갔습니다. 저 같은 일반인이 신라적성비와 적성산성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단양팔경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신라적성비 비각 지붕이 빼꼼이 올려다보입니다. 어찌 보면 온전한 형태로 신라적성비를 전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약 1500년 전 세상이 오늘날 세상을 신기한 듯 눈만 내놓고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커피고 뭐고, 주전부리고 뭐고 먼저 신라적성비부터 만나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왼쪽으로 돌아가도 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도 됩니다. 저는 왼쪽으로 돌아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올라가는 길 중간에 충주호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안내판을 찬찬히 읽어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입니다.

1985년에 충주댐이 준공되면서 담수가 시작되었고, 옛 단양이 통째로 수몰되면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버리고 현재 단양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는 그냥 큰물이 아니라 수면 아래에 옛 단양이 통째로 품고 있는 큰물입니다. 제 눈에는 그저 큰물밖에 안 보이지만 실향민들은 물속 고향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내판에 저 같은 사람도 어느 정도 꿰뚫어볼 수 있도록 옛 단양 사진을 알뜰히 전시해 두어서 고마웠습니다.

이제 신라적성비를 향해 발길을 이어 갑니다.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헤맬 일은 전혀 없으나 찾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수풀과의 전쟁을 조금 치러야 합니다.


꺾고 꺾고, 걷고 걸으면 붉은빛이 가미된 산성 밑에 도착합니다. 적성산성입니다. 신라적성비는 적성산성 내에 있습니다. 그래서 잘 정비된 계단을 따라 산성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계단 중간에 왼편으로 잘 정비된 성벽이 웅장하게 곧추서 있는데요, 이는 앞으로 돌아볼 적성산성의 극히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선 그냥 지나치겠습니다. 신라적성비부터 모두 살펴보고 적성산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벽을 뛰어올라 산성 안으로 들어서자 시야가 뻥 뚫립니다. 단양팔경휴게소는 물론이고 남한강까지 발밑에 있습니다. 하지만 감동을 받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한 단 더 위에 신라적성비가 있고, 그곳에서는 여기에서 보는 풍경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발밑에 두고 있기에 감동이 더 클 것입니다. 발이 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제가 발을 이끌어 한 단을 얼른 더 뛰어오릅니다.



드디어 비각 앞에 섰습니다. 비각은 비각일 뿐이니 비를 만나기 위해 다가갑니다.

드디어 신라적성비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바로 앉아서 비를 찬찬히 살펴보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읽어 보았습니다. 약 1500년이나 버틴 돌과 글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생생하게 정갈하게 살아 있습니다.
신라적성비는 현재 위치에서 1978년 1월 6일에 발견되었습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위쪽이 넓고 두꺼우면서 아래로 갈수록 좁고 얇아집니다. 높이는 93cm, 위쪽너비는 107cm, 아래쪽너비는 53cm, 두께는 위에서 아래로 22cm, 14cm, 5cm입니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에 얕게 새겨져 있으며, 여전히 생생하고 정갈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지붕돌과 받침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성토한 흔적과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소중한 신라적성비 조각들과 기와, 토기, 칼, 화살촉 등이 다수 수습되었습니다. 발굴로 확인된 사실들, 그리고 적성산성 내 위치, 그리고 주변 지세 등을 종합해 볼 때 적성산성이 축조된 뒤 지휘 본부 같은 것이 여기 있었고, 거기에 신라적성비가 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적성비에 새겨진 글자는 총 430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행부터 19행까지 20자씩, 20행부터 21행까지 19자씩, 마지막 행이 12자입니다. 이 중에 1행부터 4행까지, 8행부터 10행까지, 13행부터 16행까지가 크게 망실되었고, 중간중간에 격지로 떨어져 나간 글자까지 있어서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총 288자이며, 격지 중 일부는 다행히 주변 발굴 조사에서 찾을 수 있었고, 거기서 城在(성재), 阿干(아간), 第次(제차) 등 21자를 얻어서 현재까지 총 309자를 읽어 냈습니다.

확인된 비문의 첫머리는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했다’입니다. 고맙게도 10명의 고관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망실된 글자를 추측으로 채워서 맞추어 보면 대략 伊史夫(이사부), 豆彌(두미), 西夫叱(서부질), 居柒夫(거칠부), 內禮夫(내례부), 高頭林(고두림), 比次夫(비차부), 武力(무력), 導設(도설), 助黑夫(조혹부) 등입니다. 이 중에 이사부는 지증왕 대부터 진흥왕 대까지 북방 개척을 담당한 주역이고, 거칠부는 이사부로부터 그 역할을 넘겨받아 수행한 인물이고, 내례부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노리부(弩里夫)와 동일한 인물이고, 비차부는 551년에 거칠부가 고구려 10군을 빼앗을 때 함께 출정한 장군이고,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으로서 553년에 백제의 동북 지방을 빼앗아 설치한 신주의 군주입니다. 이런 역사적 인물들이 비석 속에 생생히 나열되어 있으니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시울까지 붉어집니다.

신라적성비에서 신라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기를 국경을 넓히는 사업에 공을 세운 적성 사람 야이차(也爾次)를 전사법(佃舍法)에 의거하여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처럼 공을 세운 사람에게 똑같이 포상을 내리겠다.’
이런 내용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등 여러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등장하는 것과 그 취지가 같습니다. 신라적성비가 비록 진흥왕이 국경을 넓히는 사업 중에 순행하면서 세운 비는 아니지만 그런 비들의 시초가 되기에 그 가치가 큽니다. 비문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545년에서 550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므로 제작 시기 또한 당연히 여러 진흥왕 순수비보다 빠릅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확인된 비문을 현대 한자에 맞추어서 옮겨 적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ㅇㅇ年ㅇ月中王敎事大衆等喙部伊史夫智伊干
支沙喙部豆彌智彼珎干支喙部西夫叱智大阿干
支ㅇㅇ夫智大阿干支內禮夫智大阿干支高頭林
城在軍主等喙部比次夫智阿干支沙喙部武力智
阿干支鄒文村幢主沙喙部噵設智及干支勿思伐
城幢主喙部助黑夫智及干支節敎事赤城也尒次
ㅇㅇㅇㅇ中作善庸懷懃力使死人是以後其妻三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許利之四年小女師文
ㅇㅇㅇㅇㅇㅇㅇㅇㅇ公兄鄒文村巴珎婁下干支
ㅇㅇㅇㅇㅇㅇㅇㅇ前者更赤城烟去使之後者公
兄ㅇㅇㅇㅇㅇㅇㅇㅇ異葉耶國法中分與雖然伊
ㅇㅇㅇㅇㅇㅇㅇㅇㅇ子刀只小女烏禮兮撰干支
ㅇㅇㅇㅇㅇㅇㅇㅇ使法赤城佃舍法爲之別官賜
ㅇㅇㅇㅇㅇ弗兮女道豆只女悅利巴小子刀羅兮
ㅇㅇㅇㅇㅇ合五人之別敎自此後國中如也尒次
ㅇㅇㅇㅇㅇㅇ懷懃力使人事若其生子女子年少
ㅇㅇㅇㅇㅇㅇㅇ兄弟耶如此白者大人耶小人耶
ㅇㅇㅇㅇㅇ道使本彼部棄弗耽郝失利大舍鄒文
村幢主使人ㅇㅇㅇㅇ勿思伐城幢主使人那利村
ㅇ第次ㅇㅇㅇㅇㅇㅇ人勿支次阿尺書人喙部
ㅇㅇㅇㅇㅇㅇㅇㅇ使人石書立人非今皆里村
ㅇ道使ㅇㅇㅇㅇㅇ智大烏之

신라적성비를 살펴보고 나서 뒤에 놓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뒤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아래로 내려가는데요, 왼쪽으로 절벽까지는 아니지만 꽤 경사가 급한 비탈이 따릅니다. 이는 아직 복원되지 않은 적성산성 북쪽 성벽으로 언제인가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날이 올 것입니다. 숲길이 끝나고 시야가 트이면, 복원된 구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성산성은 전체적으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누워 있는데, 북동쪽 끝에 해당합니다.

성벽 위에 올라가서 따라 걸어 봅니다.


얼마 안 가서 적성산성이 얼마나 요충지에 들어서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사방이 훤히 보이고, 물길이 다 확인됩니다. 남쪽으로는 죽령을, 북쪽으로는 남한강을, 동쪽으로는 죽령천을, 서쪽으로는 단양천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됨으로써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과 죽령을 넘나드는 길 등을 모두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죽령을 넘어가면 바로 전통적인 신라 땅이기에 신라는 이곳 적성 지역을 취하자마자 산 정상을 빙 두르도록 920m 남짓 되는 이런 강력한 적성산성부터 구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심을 잡기 위해 신라적성비도 세우고요. 지역 이름조차 고구려 때 적성이란 이름을 그대로 따릅니다.


축석 방식은 돌과 진흙으로 기초를 다진 후 성벽 안을 돌로 채우면서 안팎을 납작한 자연석으로 엇물리게 쌓아 가는 내외협축식입니다. 바깥쪽에서 보면 성벽이 웅장하게 곧추서 있지만 안쪽은 그리 높지 않을뿐더러 병마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다져 놓았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벽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어서 가능한데요, 이렇게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 형태를 퇴뫼식이라고 합니다.

이쯤에서 성 밖으로 나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런 소중한 유적인데 바깥쪽에서도 한번 구경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다행히 복원된 성문이 북동쪽 끝에 있습니다. 문 안쪽에 남아 있는 석환 무더기는 투석용으로 추정 추정됩니다.

잘 놓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성벽 밑동을 따라 진행합니다. 적성산성을 북동쪽 끝에서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너덜 지대는 아직 복원되지 않은 구간입니다. 적성산성에는 우리가 나온 동쪽 문 말고도 남동쪽에 하나, 남서쪽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가 걷는 이 길이 남동쪽 문 앞을 지나는 것 같은데, 전혀 복원되어 있지 않다 보니 가늠조차 불가능합니다.
성벽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아까 통과했던 갈림길이고, 이제 적성산성을 떠나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성벽은 남서쪽으로 계속 나아가지만 탐방로가 여기까지라서 저는 더 갈 수 없습니다. 참고로 가 보지 못한 남서쪽 끝에 능선을 따라 축조한 치가 있고, 그 아래에 보축 성벽이 남아 있어서 남서쪽 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제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몇 걸음을 안 내려가서 다시 한 번 길이 갈라집니다. 오른쪽이 아까 우리가 올라온 길이니 왼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신라적성비와 적성산성에 관한 커다란 안내판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쪽으로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안내판에 하늘에서 내려다본 적성산성 사진과 적성산성 전체에 관한 안내도가 걸려 있어서 제가 어디를 거쳐서 어떻게 돌아보았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안내판을 떠나서 조금 더 내려가니 단양팔경휴게소로 들어가는 쪽문이 나오고, 들어서기 전에 뒷골이 당겨서 돌아보니 적성산성이 한창 때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도록 길게 누워 있습니다.


